지난 2012년, 여름으로 접어들기 전 지인들과 전라남도 여수시를 찾았습니다. 그땐 3인조 밴드 버스커 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를 전혀 모르던 때였죠. 여수항, 향일암, 돌산대교 그리고 여순사건 외엔 전혀 아는 바가 없던 지역을 생전 처음 찾은 만큼 이곳 명물을 접하고픈 생각뿐이었고요.
1949년 오늘은 당시 이승만 정권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금지곡을 지정한 날입니다. 이 노래의 제목은 여수야화(麗水夜話).
무너진 여수항에 우는 물새야 우리 집 선돌 아범 어데로 갔나요 창 없는 빈집 속에 달빛이 새여들면 철없는 새끼들은 웃고만 있네 / 가슴을 파고드는 저녁 바람아 북청 간 딸 소식을 전해 주려무나 에미는 이 모양이 되었다만은 우리 딸 살림살인 허벅지더냐 /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더니 오늘엔 식구끼리 싸움은 왜 하나요 의견이 안 맞으면 따지고 살지 우리집 태운 사람 얼굴 좀 보자 |
'목포의 눈물'을 부른 유명 가수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 작사, 김초향 작곡, 당시 최고의 가수 남인수가 부른 이 대중가요는 여순사건으로 파괴된 한 가족의 비극을 들려줍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 노래가 반정부적이라 자신이 판단한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방송, 공연, 음반 판매, 악보 출판 등 곡과 관련한 전체를 금지했고요.
여순사건(여수·순천사건)은 1948년 10월19일부터 10월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참사입니다. 여수에 주둔 중이던 조선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군인 2000여 명이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승만 정권은 해당 군인들은 물론 이 사건과 조금이라도 엮인 모든 민간인들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반란군과 정부 측 진압 군경에게 희생된 민간인 사망자는 2500~5000여 명, 재산 피해는 100억 원 정도로 추산되고요. 여수야화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금지곡이라면 트로트를 위시해 우리 땅에서 대중가요가 금지곡으로 지정된 사례는 1920년대부터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아리랑 등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노래,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뉜 후엔 월북 음악인들의 노래가 모두 금지곡 명단에 올랐죠. 또 왜색, 표절, 창법·가사·품위 저속, 퇴폐, 허무, 비탄, 불신감 조장, 불건전 등도 금지곡 지정 사유였고요.
시간이 흘러 1967년 박정희 정부는 '음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며 사전심의제도를 만들었고 1996년 이 제도가 위헌 판정을 받기까지 정치적 입맛에 맞춰 어이없는 이유를 대며 대중가요를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몇 가지 국내 곡 사례를 살펴볼까요?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 가사 중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서 살고 있나" - 월남 파병 풍자 ·김추자 '거짓말이야' 중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 사회분위기 저하 및 정치 현실 풍자 ·김민기 '아침 이슬' 중 "긴 밤 지새우고" - 유신 비판,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 북한 지도자 연상 ·방주연 '꽃과 나비' 중 "그대는 나를 지켜주는 태양의 사나이" - 북한 지도자 연상 ·이금희 '키다리 미스터 김' - 165㎝ 단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 심기불편 ·한대수 '물 좀 주소' - 물 고문 연상 ·배호 '0시의 이별' - 야간 통행금지 위반 |
특히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은 박정희 찬가의 제작을 거부해 전체 곡이 금지곡 리스트에 묶였고 반항적 이미지의 밴드 들국화는 퇴폐 풍조 조장 및 보컬 전인권의 창법미숙, 발음 부정확, 음정 불안을 이유로 수난을 당했습니다.
이외 이미자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 왜색, 김민기 '늙은 군인의 노래' - 불건전, 송창식 '왜 불러' - 반항적 정서 및 시의 부적절, '고래사냥' - 퇴폐염세적, 이정민 '사랑이 외로워 울었네' - 비탄, 조영남 '새야 울지 마라' - 품위 없음 등의 사유도 헛웃음이 납니다.
또 이장희 '그건 너’ - 정권에 책임전가, 쟈니리 ‘내일은 해가 뜬다’(사노라면 원곡) - 현실 부정, 심수봉 '무궁화' - 국민 선동 우려, '순자의 가을' - 전두환 부인 이순자 연상, 김정미 '바람' - 창법 저속 등 셀 수 없이 많은 노래들이 고초를 겪었던 과거였네요.
/이슈에디코 전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