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하는 김수경의 영화·씨네필 관련 이모저모 이야기' |
올해 마지막 수영씨 이야기는 지난 6일 막을 내린 50회 '서울독립영화제(서독제)'에서 본 영화와 올해 본 영화를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비상계엄령 사태라는 비정상적인 일이 우리나라에 터지면서 차마 키보드에 손이 가지 않더군요. 정말 재밌게 쓰고 싶었는데…….
일단 조심스레 한 글자씩 적자면, 우선 앞서 말한 서독제는 계엄 사태를 두 번이나 경험한 영화제입니다. 지난 1975년 한국청소년영화제로 시작한 서독제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발판이 된 신군부 비상계엄과 올해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겪었죠.
이런 외부 상황에 더해 예산 삭감이란 내부 어려움까지 겪었던 올해 서독제는 역대 최다 관객 수인 1만9575명을 기록하며 성황리 마무리됐습니다. 혼란스러운 시국에도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는 방증인 셈이죠.
그렇다고 영화에 빠져 작금의 한탄스런 현실을 외면한단 얘기는 아닙니다. 영화산업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외친 사람들과 사건은 빠질 수 없는 소재이기도 하고요.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은 우리나라 역시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계기를 갖곤 합니다. (관련 기사: 어느새 37년 지난 6·10민주항쟁…심박수 치솟는 영화들)
지난달 29일 열렸던 제45회 청룡영화상에서 작품상을 받은 '서울의 봄'은 지난 1979년 12·12사태 당시 9시간 동안 일어난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개봉 한 달 만에 1000만 관객을 모았는데요. 지난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Over The Top) 넷플릭스에서 이 작품은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그려낸 영화 '택시운전사'나 1980년 6월 민주항쟁을 배경으로 한 '1987'은 티빙, 쿠팡플레이, 웨이브, 왓챠 등에서 인기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기도 했고요.
이 와중에 가장 최근에 재밌게 봤던 '더 킬러스'도 우연치 않게 현 시국과 맞닿았습니다. 김종관·노덕·이명세·장항준 감독이 미국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살인자들'을 각자의 스타일로 풀어낸 네 편의 단편영화를 묶어 둔 작품인데요. 네 편의 영화 속에는 배우 심은경 씨가 엄청난 열연을 하며 영화의 기강을 잡아줬습니다.
사실 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좋거나 나쁜 동재'를 빗대어 올해 봤던 '좋거나 나쁜 영화'를 작성하고 싶었는데요. 이들 단편 가운데 나쁜 영화로는 장항준 감독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를 꼽으려고 했습니다.
아니길 바랐던 뻔한 반전부터 심은경이라는 배우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도 그렇거니와 비교적 다른 작품들보다 얼굴이 더 알려진 배우들이 열연했음에도 많은 실망을 안겨줬거든요. 올해 여름 개봉한 '오픈 더 도어'부터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까지 장 감독은 제 기대에서 벗어나기만 했네요.
아무튼 장 감독의 단편 배경은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일인 지난 1979년 10월26일입니다. 우리 역사의 엄청난 변곡점이 있던 밤에 '이 사람들이 기다리는 자는 구원자인가, 선일까 악일까'라는 고민을 시골 선술집에서 풀었다는 게 그의 설명인데요.
이 영화는 선술집에서 모인 이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죽인 끝에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은 채로 끝이 납니다. 살아 걸어간 사람의 발걸음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 시대 비극을 일깨우고 싶었다네요.
이 영화의 총괄 디렉터였던 이명세 감독은 '무성영화'라는 작품을 정말 무성영화로 연출했는데요. 이 작품은 1979년 한 발의 총소리로 시작하며 고장 난 시계를 통해 6·10 민주항쟁을 표현했습니다.
영화 속 식당 시계는 10분 빨리 흐르는데, 6시10분이 되기 전까지 식당 속 사람들은 살인자 폭력에 저항하는데요.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시대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반복적인 배우의 액션을 통해 민주주의 속 투쟁했던 시민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 이야기의 끝은 다시 앞서 언급했던 서독제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번 서독제 슬로건은 '오공무한대'로 이에 맞춰 개막 영상 '징크스 몽타주'가 공개됐는데요. 배우이자 감독인 구교환 씨가 연출을 맡은 이번 영상의 로그라인은 '50년을 만난 연인에게 종말이 다가온다'입니다.
영상 속 연인들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싸우는데요. 영화 속 남자는 "나는 언제고 네 옆에 있으니까. 네가 다른 사람 좋아해도 네 옆에 있으니까. 네가 나랑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기다리니까"라며 여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는 마치 영화가 관객에게 속삭이는 문구 같은데요. 항상 영화관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제든 다시 함께 보내자는 영화의 애절한 고백인 셈이죠.
이 대사는 현 시국에 맞서는 국민들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국민들은 언제든지 늘 민주주의 옆에 있습니다. 잠시 그 모습이 사라지더라도 언제든 기다리고요.
이 영상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몸이 아픈 여자가 "너를 사랑할 때 몸이 아프지 않았던 건, 네가 나를 빨리 좋아해 줘서 몸이 덜 아팠던 거야"라고 외치기도 하는데요. 매서운 추위에도 국민들이 여의도 국회 앞에 모인 이유도 이 같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루빨리 우리나라에 민주주의 불씨가 되살아나 국민들의 시린 속을 데워줬으면 하네요.
/이슈에디코 김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