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지난달 30일 성황리에 열린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전주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선을 넘지'라는 기치 아래 올해 열린 올해 영화제 예매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죠. 지난달 18일 오전 11시에 열린 일반 예매는 같은 달 25일 오후 5시 기준 전체 판매분의 85% 이상이 예매됐는데, 이는 역대 전주국제영화제 중 최고 예매 수치라고 합니다.
전주국제영화제는 다른 영화제처럼 평소 보기 힘든 전 세계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영화인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이벤트가 많다는 특징을 지녔는데요. 이런 이벤트 가운데 지난 2022년부터 시작한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는 늘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영화인이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돼 자신만의 영화적 시각을 관객에게 소개하는 특별 섹션인데요.
올해는 배우 이정현 씨가 프로그래머로 등장했습니다. 그는 지난 1996년 장선우 감독의 '꽃잎'에서 '연기 천재'라는 칭호를 받으며 영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죠. 이후 다수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거머쥔 이정현 씨는 지난 1999년 돌연 테크노 댄스 가수로 변신해 세간의 이목을 받았고요.
가수 활동 기간에도 ▲와 ▲바꿔 ▲줄래 ▲반(半) ▲아리아리 등 여러 히트곡을 배출하면서 수차례 음악 관련 수상도 하며 2000년 중후반에는 중국에 진출해 한류스타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이 씨는 올해 영화제에 ▲박찬욱 감독 '복수는 나의 것(2002)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아무도 모른다(2004)' ▲다르덴 형제 '더 차일드'(2005)에 더해 자신이 열연한 ▲장선우 감독 '꽃잎(1996)' ▲안국진 감독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 ▲박찬욱·박찬경 감독 '파란만장(2011)'을 추천작으로 선정했는데요.

지난 2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올해 'J 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 제안을 받아 영광스럽다"며 "같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얘기를 하는 게 처음이라 잘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매우 재밌고 행복하다"고 운을 뗐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추천작을 설명하던 중 영화계 복귀에 대한 은인으로 박찬욱 감독을 언급하네요. 이 씨는 지난 2011년 박찬욱·박찬경 감독의 단편영화 '파란만장' 출연을 계기로 수많은 시나리오를 받아 영화계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연기 천재로 불렸지만, 당시 미성년자였던 터라 들어오는 대본이 많지 않았고 성인이 된 이후 테크노라는 음악 장르에 빠져 가수로 연예계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사석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이 꽃잎을 언급하며 "연기를 왜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는데요.
꽃잎이 미성년자 관람불가여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는 그에게 박 감독은 "꽃잎을 잊지 말고 필요한 사람에게 선물하거나 간직하며 배우라는 직업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과 함께 DVD로 10여 장을 제작해서 선물했다고 합니다.

DVD를 받고 처음으로 끝까지 꽃잎을 감상한 이 씨는 너무나 가슴 아프고 충격적인 소재임에도 시적으로 찍어낸 장선우 감독이 괜히 거장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러면서 "계속 인사를 못 드리다가 3년 전 한 시상식에서 보게 됐고 올해 프로그래머로 선정돼 같이 꽃잎을 보고 싶다 연락해 동행해 줬다"고 말했는데요. 그 덕분에 장 감독은 지난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이후 오랜만에 영화제 나들이를 하게 됐습니다.
영화 파란만장 이후 다시 영화계에 얼굴을 비춘 그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2015년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았고요.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와 연상호 감독의 '반도',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등을 통해 다시 대중에게 영화배우라는 각인을 톡톡히 남겼습니다.
배우로의 삶을 이어가던 중 그는 연출에 대한 꿈을 키워 현재 대학원에 진학해 학업에 열중하고 있죠. 여기서 탄생한 그의 첫 연출작 '꽃놀이 간다'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개봉합니다. 창신동 모자 사건을 모티프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엄마와 딸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라고 하네요.

창신동 모자 사건은 지난 2022년 4월 서울 종로구 창신동 옛 주택에서 80대 노모와 50대 아들이 생활고 끝에 숨진 채 발견된 사건입니다. 당시 수도요금 체납을 위해 방문한 수도사업소 직원에 의해 사망한 지 약 한 달 만에 발견돼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죠.

이 씨는 "40대에 접어들고 아이를 낳다 보니 세상을 보는 관점 풍부해졌는데, 당시 이 사건을 봤을 때 가슴 아팠고 이를 토대로 복지 사각지대에 처한 모녀의 이야기를 시나리오를 작성했다"며 올해 이곳에서 공개됐는데, 예산 500만 원밖에 안 돼서 부족했음에도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 다행이라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영화 제작 중 1인 제작사 '와필름'을 설립한 그는 이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꾸준히 알릴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관객과 만나고 싶다는 포부도 내비치네요. 다음 달 들어가는 차기작 역시 생활형 범죄를 저지르는 모녀의 얘기라고 합니다.
간담회 말미에 그는 "가수로 활동할 때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하루 여러 스케줄을 소화하며 노래를 부르는 기계라고 느낄 정도로 가장 불행했던 시간이었다"며 "결혼과 출산 이후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아 다시 영화를 찍으면서 마음이 편해졌고 팬들을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됐다"고 제언했는데요.
연기 천재로 시작해 테크노 여전사, 각종 영화제를 휩쓸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이정현 씨의 배우, 연출자로서의 '4막 인생'도 기대됩니다.
/이슈에디코 김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