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열어 먹을 것을 뒤지던 중 지난달 마트 과일 코너에 먹음직스럽게 진열돼 끌리듯 구매했던 대저토마토를 찾았습니다. 대저토마토를 구매했던 지난달 21일 저녁, 웹서핑을 하다가 부산 강서구 대저동에서 이날 제23회 대저토마토축제가 열렸다는 소식을 접한 기억이 확 떠오르네요. 그렇습니다. 사놓기만 하고 기억도 하지 못한 채 한 달 훌쩍 넘는 날짜가 지나버렸던 것입니다 하하ㅠㅜ
짭짤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대저토마토는 3월 중순부터 4월까지 당도가 가장 높은 시기로 요리보다 생과가 더 맛있다고 합니다. 냉장보관 시 보관기한은 일주일 정도라는데 저와 한 달을 함께 한 대저토마토는 과감하게 포기해야겠군요.
대저토마토를 생전 처음 구입한 날, 대저토마토축제도 축제지만 대저동에서 재배해 대저토마토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신기하게도 같은 씨앗을 다른 지역에 심으면 우리가 아는 대저토마토 맛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네요.
낙동강 하구에서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며 만들어진 토양이 특유의 짭짤한 풍미를 내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저토마토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 지리적표시 제86호로 등록돼 있습니다. 이름이 곧 품질의 보증서인 거죠.
빼앗긴 종자에도 이름은 붙는가
우리가 익히 아는 청양고추는 충남 청양군에서 나는 고추가 아니라 경북 청송의 '청'과 영양의 '양'에서 온 이름이죠. 그런데 이 고추에는 이름 논쟁보다 더 씁쓸한 뒷얘기가 있습니다.
지난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청양고추를 개발한 중앙종묘가 멕시코계 다국적 기업 세미니스에 인수됐고, 이후 미국 몬산토를 거쳐 2018년에는 독일 바이엘에 매각됐죠. 우리가 가장 많이 먹는 매운 고추의 종자 주인이 독일 기업이라 우리 농민이 청양고추를 재배하려면 독일에 로열티를 내야 하는 목 칼칼한 현실입니다.
또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청양고추는 1983년 중앙종묘의 유일웅 박사가 태국 재래종과 제주 재래종 고추를 교배해 개발할 당시 식용 목적의 품종이 아니었답니다. 카레 제조에 필요한 캡사이신 추출용이었으나 시험 재배하던 청송·영양 지역 농가에서 매운탕에 넣으니 맛이 좋다는 반응이 나왔고 횟집에서도 인기를 끌자 식용으로 바뀐 거죠.
물론 충남 쪽은 과거부터 청양 지역에서 종자를 골라 재배했다고 주장하며 2000년부터 축제까지 개최하는 상황이라 논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청양고추가 종자를 빼앗겼다면 겨울 딸기의 대명사 설향(雪香)은 종자 주권을 갖게 된 경우입니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라는 의미의 이 이름은 2005년 충남농업기술원 논산딸기시험장에서 개발한 국산 품종에 붙여졌죠.
설향 탄생 전까지 국내 딸기 시장의 85~90%는 일본 품종인 장희(아키히메)와 육보(레드펄)가 차지해 우리 농가는 연간 30억 원이 넘는 로열티를 일본에 내야 했습니다. 설향은 이 두 품종을 교배해 만든 국산 품종입니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열매가 많이 맺히는 장희의 장점에 병충해에 강한 육보의 장점을 합친 설향의 보급률이 2007년 28.6%에서 2009년 51.8%로 오른데 힘입어 2021년 기준 국산 딸기 품종의 보급률은 96.3%까지 치솟았죠.
기억이 되는 이름들
어원이 바뀌면서 원래 뜻이 잊힌 사례도 있는데요. 꽃게의 '꽃'은 식물의 꽃(花)이 아니라 뾰족하게 돌출된 지형을 뜻하는 '곶(串)'에서 왔다는 설에 무게가 실립니다. 성호사설에서는 곶해(串蟹)라는 기록이 있거든요. 등딱지 양끝이 곶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생김새에서 '곶게'라 부르던 것이 발음이 변해 '꽃게'가 됐다는 거죠.
서서갈비는 먹는 자세가 이름이 된 사례입니다. 원조 격인 연남서식당은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가족을 잃은 창업주가 길가에 드럼통 세 개를 깔아놓고 잔술을 팔기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었다죠? 뜯어먹기 번거로워 기피하던 저렴한 반찬 겸 안주 소갈비를 서울 대중교통의 종착지 마포에서 배차시간에 쫓기는 버스 기사들이 선 채로 먹고 가며 단골이 됐습니다.
이 드럼통 앞을 거친 수많은 단골들은 변변한 상호도 없던 이 가게를 서서갈비라 부르며 자발적 네이밍을 했고 지금은 서울미래유산에도 등재돼 명성을 유지하는 중입니다.
명성이 아니라 오히려 험상궂은 생김새로 천대받던 아귀는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어부들이 그물에서 꺼내자마자 버렸던 물고기였지만 1960~70년대 신세가 달라졌습니다.
경남 마산 어시장 근처에서 버려지던 아귀를 된장과 콩나물에 넣고 매콤하게 끓여 먹기 시작한 것이 아구찜의 시초로 알려졌죠. 지금은 마산 오동동 아구찜 골목이 전국구 맛집 명소가 됐고, 아귀도 어엿한 고급 어종 대접을 받습니다.
아울러 초당옥수수는 강릉 초당동에서 나는 옥수수가 아니라 초(超)월할 초, 엿(糖) 당 자를 써 당도를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이름도 Super Sweet Corn이고요. 물론 초당순두부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 선생의 호(草堂)에서 온 강릉 초당동의 지명이 맞습니다.
이처럼 흥미로운 이름 얘기처럼 가격표도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주변의 이 귀한 먹을거리들은 모두 한 편의 짧은 서사를 지니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서사가 어떻든 우리가 섭취하는 이 땅의 모든 것은 역사가 인정하는 자연 그 자체의 브랜드겠죠.
/이슈에디코 강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