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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사이] 전신을 비추는 시간

 

문득 거실에 있는 전신거울이 눈에 띄어 찍었습니다. 그저 비치는 모습을 담기만 할 뿐 거울 그 자체가 담긴 적은 없었을 거라 생각하니 이상하게 측은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모든 것을 반사해 비추는 피사체라니 이색적이기도 하고요.

 

이번 편에서는 전체를 비추며 예전과 다른 내 모습을 돌아보고 회상에 잠기게 하는 전신거울처럼 시대의 흔적을 사명에 새긴 기업들의 과거를 살피려 합니다. 

 

기업에 있어 전신거울 역할을 하는 건 어쩌면 바로 옛 이름이 아닐까요? 지금은 알파벳 두세 글자로 줄어든 대기업 이름들이 태동할 때는 짧지만 친절한 설명과도 같았거든요.

 


단출했던 과거, 성장으로 흘러간 역사


오늘은 5월 9일이라 이 날짜부터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 76년 전 바로 이날, 서울 용산구 갈월동 소재 동방청량음료합명회사라는 작은 업체에서 사이다 한 병이 세상에 나왔죠. 지난 1949년 12월 성(姓)이 모두 다른 7명의 주주가 국산 사이다를 만들자는 의지를 모아 설립한 회사의 첫 작품이 칠성사이다입니다.

 

당초 일곱 주주의 성이 모두 다르다는 데서 칠성(七姓)이라 했다가 북두칠성처럼 번영하자는 뜻을 담아 칠성(七星)으로 바꿨다네요. 이후 동방청량음료는 칠성음료공업, 칠성한미음료를 거쳐 1974년 롯데에 인수되면서 지금의 롯데칠성음료가 됐습니다. 사명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칠성사이다라는 제품명은 76년째 그대로고요.

 

이런 사례는 꽤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의 시작은 1896년, 서울 종로 배오개에 연 포목점 '박승직상점'으로 오늘날 두산그룹의 모태가 됐죠. 창업주의 아내 정정숙은 1915년 '박가분(朴家粉)'이라는 한국 최초의 화장품까지 만들어 팔며 큰 인기를 끌었고요.

 

기아는 자전거 바퀴 먼저 굴렸습니다. 1944년 김철호가 서울 영등포 문래동에 세운 경성정공주식회사는 자전거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죠. 1952년 기아산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국 최초 자전거 완제품 '3000리호'를 내놨습니다.

 

삼천리 금수강산을 누비자는 통일의 염원을 제품명에 새겨 판매하다가 1979년 자전거 부문을 분사하면서 지금의 삼천리자전거가 됐고, 기아는 자동차로 방향을 완전히 틀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CJ의 출발점은 제일제당이죠. 1953년 11월 5일, 부산 공장에서 국내 처음 흰 설탕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전후 한국에서 설탕은 600g 한 근에 300환, 같은 무게의 소고기보다 두 배나 비싼 귀한 물자였고요.

 

LG는 이름의 변천 자체가 하나의 역사입니다. 1947년 부산에서 락희화학공업사로 출발해 국산 화장품 '럭키크림'을 만들었고, 1958년에는 금성사가 설립되면서 이듬해 국내 최초의 국산 라디오 'A-501'이 탄생했죠. -SS501의 U R Man을 이 라디오로 들으면 새로운 감상에 젖지 않았을까 하는 세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락희, 럭키, 금성, 럭키금성. 지금의 LG라는 두 글자 안에는 그 모든 시간이 접혀있는 겁니다.

 

포스코(POSCO, POhang iron and Steel COmpany)의 옛 이름은 국가 산업화의 목표가 거의 그대로 박혔죠. 1968년 설립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경북 포항에서 국가가 필요로 한 종합제철 산업을 영위하려는 의지의 사명이었습니다.

 


낯설던 과거, 다시 만들어지는 흐름


낯선 첫 이름들은 얼마든지 더 나열할 수 있죠. SK의 출발점인 선경직물은 1953년 한국전쟁의 폐허 속 수원에서 세워졌는데 '선경(鮮京)'이라는 이름 자체가 일제강점기 합작회사인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경도)직물의 '京'을 합친 것이었습니다.

 

한화는 1952년 부산에서 출발한 한국화약주식회사, 삼성그룹의 출발점은 1938년 대구의 삼성상회였고 아모레퍼시픽은 태평양화학공업사라는 이름으로 화장품과 화학의 경계에서 자랐습니다. KT는 1981년 체신부의 통신사업을 분리해 만든 한국전기통신공사였죠.

 

선경직물, 한국화약, 삼성상회, 태평양화학공업사, 한국전기통신공사. 지금의 SK, 한화, 삼성, 아모레퍼시픽, KT. 이름이 짧아진 만큼 사업의 반경은 넓어졌지만, 긴 이름 속에 담겨 있던 시대의 솔직함은 오히려 사라졌습니다.

 

최근에는 이름을 바꾸는 흐름이 다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잡코리아는 올 1월 사명을 '웍스피어(Worxphere)'로 바꾸면서 인공지능(AI) 기반 인적자원(HR, Human Resource) 테크 그룹으로의 전환을 선언했고, 현대엔지니어링은 잇따른 중대재해 이후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지난 4월부터 사명 변경을 추진 중이죠.

 

과거의 사명 변경이 '무엇을 만드는가'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면, 근자의 리브랜딩은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를 선언하는 행위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네요. 동방청량음료 등 과거의 사명은 분명 낯설지만 이 이름들이 있었기에 현재 익숙한 기업들의 전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겠죠.

 

전신거울은 만들어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비추는 대상 그대로를 비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울에 왜곡이 있으면 모두에게 바른 모습을 비추지 못합니다. 우리 기업들이 왜곡된 모습으로 보인다면 거울 앞에 선 기업 자체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거겠죠.

 

우리 기업들의 긴 이름들 안에는 대한민국이 무엇을 먹고, 입고, 만들고, 연결하며 커 왔는지에 대한 역사가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겁니다.

 

/이슈에디코 전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