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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사이] 빛을 앞에 두고

 

인천 제물포구 소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제49호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과 외부 도로를 이어주는 홍예문(虹霓門)입니다. 소싯적에 친구들과 이곳에 올라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초로(草露)의 한숨을 내뱉던 때가 떠오르네요.

 

여러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유명세를 탄 곳인데 어두운 터널 안쪽에서 입구 너머 바깥의 빛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 밝음과 푸르름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죠. 몇 걸음이면 닿을 빛을 앞에 두고도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한때의 여유로움도 참 좋았습니다.

 

활짝 열려 안과 밖을 이어주는 이 피사체는 하늘이 열린 오늘과 맞닿은 얘깃거리라 더욱 좋군요. 동굴의 경계를 지우고 새 하늘을 연 오늘은 개천절입니다. 고려 후기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고조선 조를 보면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면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환웅에게 빌었다고 하죠.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며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을 얻으리라 일렀고요. 곰이 여자의 몸을 얻기까지 걸린 시간은 백 일이 아니라 삼칠일, 곧 21일이었습니다.

 

흔히 이 얘기를 인내의 승리로 풀이하죠. 햇빛도 보지 못한 채 쓰고 매운 것만 먹으며 버틴 곰이 끝내 사람이 됐다는 얘기니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조금 오래 들여다보면 뭔가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가두고 인내하는 인간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곳곳이 인내의 동굴입니다. 202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올해 11월 19일로 예정됐는데 오늘로 47일을 앞둔 수험생들은 저마다의 굴에서 하고 싶은 것을 미루고 있을 겁니다. 수험생뿐 아니라 저마다의 간절한 바람이 있는 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고 목표를 향하는 시간이죠.

 


기다림은 의지만의 문제일까?


기다림에 관한 가장 유명한 실험은 아마 마시멜로 실험이 아닐까요? 아이 앞에 마시멜로를 하나 놓은 후 먹지 않고 기다리면 하나를 더 둔다는 약속을 한 다음 자리를 비우는 방식인데요. 오래 기다린 아이일수록 훗날 학업 성취가 높았다는 추적 결과로 유명해졌고, 참는 힘이 곧 성공의 열쇠라는 해석이 뒤따랐습니다.

 

다만 이후 연구들은 결과가 조금 다릅니다. 미국 뉴욕대와 캘리포니아대 어바인캠퍼스 연구진이 2018년 5월 학술지 심리과학(Psychological Science)에 낸 재현 연구는 네 살 때 기다린 시간과 열다섯 살 무렵 학업 성취의 상관관계는 원래 연구의 절반 수준이었고 가정 배경과 초기 인지 능력, 양육 환경을 고려하자 그마저 3분의 2가 줄었다는 내용이죠.

 

더 흥미로운 건 미국 로체스터대 연구진이 2012년 10월 학술지 코그니션(Cognition)에 발표한 실험입니다. 연구진은 아이들을 두 무리로 나눠 한쪽에는 약속을 지키는 어른, 다른 쪽에는 약속을 어기는 어른을 먼저 만나게 했습니다. 그러자 약속을 지키는 어른을 만난 아이들은 평균 12분 남짓 기다린 반면 약속이 깨지는 걸 본 아이들은 3분 남짓 만에 마시멜로를 먹었죠.

 

15분을 끝까지 기다린 아이도 각각 14명 중 9명과 1명으로 크게 갈렸고요. 기다림은 참을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다린 끝에 정말 무언가가 오리라 믿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했던 겁니다.

 


'빛의 유혹' 나간 범, 남은 곰


이렇게 놓고 보면 범의 얘기도 다소 달리 읽힙니다. 흔히 범은 참지 못하고 굴을 뛰쳐나간 것으로 알지만 삼국유사는 범이 금기를 지키지 못했다고만 적을 뿐 무엇을 견디지 못했는지는 얘기하지 않죠.

 

마시멜로 실험의 아이들이 보여 줬듯 기다림이 인내만이 아니라 판단의 문제이기도 하다면, 범의 사례를 그저 의지가 모자란 실패로만 읽을 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되지 못한 게 아니라 당장의 빛을 보며 범으로 남는 쪽을 택한 걸 수도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21일을 견디고 인간이 된 곰의 기다림은 동굴을 나온 뒤에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된 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어 날마다 나무 아래에서 아이를 갈구했고,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그와 혼인한 끝에 태어난 이가 단군이죠. 오늘 우리가 기리는 개천절의 건국 서사에는 두 번의 기다림이 겹친 셈입니다.

 

빛을 향해 걸어 나간 범, 빛을 등지고 남은 곰. 모두 저마다의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다만 뭔가를 반드시 이루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저 자리에 앉아 빛을 떠올리며 인내하겠죠. 

 

신화는 곰이 변해 사람이 됐다지만, 어쩌면 사람이란 기다릴 줄 아는 곰에게 붙인 이름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소싯적에 친구들과 자유공원에 올라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초로의 한숨을 내뱉던 때처럼요.

 

/이슈에디코 정금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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