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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뷰] 존재하되 이름 바꾼 배트맨

연말연초 글로벌 극장가는 아직 '아바타:물의 길'의 기세가 등등합니다. 이런 와중에 우크라이나 침공 후 다수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신작 개봉을 거부한 러시아에서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아바타 상영을 강행한다는 보도가 오늘 중국 중화망 등의 외신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러시아 영화산업이 심하게 위축돼 반등을 도모하고자 영화 제작사와 원작자 동의 없는 복제 영화를 극장이 무단 상영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는데 이게 국가에서 할 일인지 냉소를 머금게 됩니다. 

 

러시아 일부 극장들은 이미 할리우드 최신작의 제목만 바꿔 불법 상영하고 있다는데 일례로 작년 5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 극장에서 '수퍼 소닉2'를 '푸른 고슴도치2',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더 배트맨'을 '박쥐'(летучая мышь)로 바꿔 상영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후속작과 리부트 등 수많은 작품이 나왔지만 여전히 제작 소식만으로도 팬들을 들뜨게 하는 배트맨의 강제 개명은 현재 전시 상황과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 히어로적(?) 고뇌와 맞물려 묘한 동색까지 느껴졌고요.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Esse, Non Videri)는 구절로 대치할 수 있으려나요? 사실 이 문장은 지주회사인 인베스터 AB를 내세운 유럽 최대·최고의 산업 왕조 '발렌베리 가문'(Wallenberg family)의 신조입니다. 

 

금융·통신·항공·건설·제약 등의 부문에서 경쟁력을 갖춘 19개 글로벌 기업을 포함해 100여 업체의 지분을 가졌는데 이 중 우리가 알 만한 업체는 제약업체 아스트라제네카와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 통신장비제조업체 에릭슨, 세계 산업용 로봇 1위 업체 ABB, 스칸디나비아 항공 등을 꼽을 수 있고요.

 

발렌베리 가문은 150년 이상 5대에 걸쳐 경영 세습을 해왔는데 순이익 대부분은 재단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고 가문 소유 재단은 다시 대학·도서관·박물관·과학연구 등 공공사업에 투자한답니다. 또 재단 및 기업 대표자는 일체의 주식 없이 급여만 받고 이사회에는 노동조합 대표자를 필수로 두고요.

 

이 가문의 후계자는 견제를 위해 2명을 뽑아 10년 이상 평가하는데 누구의 도움도 없이 명문대학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해야 하고 역시 자력으로 글로벌 금융 중심지에서 금융 실무를 체득해야 한답니다. 이후 2명이 순서를 정해 그룹 계열사 경영진 역할을 하면서 이 가문 지주사이자 자금원천인 인베스터 AB와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 최고경영자를 교대로 맡고요.

 

가문의 시조, 자손, 발전사 등 뿌리부터 가지까지 살피려면 적어도 두 편은 더 작성해야 할 듯합니다. 이 정도의 역사를 꾸린 발렌베리 가문은 '존재하나 드러내지 않는다'는 신조를 지키고자 발렌베리 그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이런 가풍을 고수한 덕에 대재벌에 날선 펜을 긋는 해외 주요 매체들도 발렌베리에게만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풍길 정도죠. 


대표적인 세습 재벌명문가지만 국민이 존경하는 가족경영기업이라니 다른 나라 거론할 것 없이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많이 본받았으면 합니다. 그러고 보니 삼성 가문의 롤모델이 발렌베리라는 내용의 타 매체 기사도 본 적이 있는 듯하네요.

 

/이슈에디코 강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