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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사이] 거장들의 식견…침묵하지 않는 양

 

2010년 가을, 강원도 평창군에 위치한 양떼목장에서 촬영했습니다. 양들 모인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아서 웃으며 찍었던 기억이 나네요. 양떼를 찬찬히 보는 것만으로도 여유와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순하면서도 약한 이미지 역시 짙지만 실제 성격은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하네요.

 

1988년 나온 토마스 해리스(Thomas Harris)의 소설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이나 필립 K. 딕(Philip Kindred Dick)이 1968년 집필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등의 제목만 봐도 그렇습니다.

 

후자로 예를 든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SF(Science fiction) 소설은 핵전쟁으로 생명체가 급감해 암울한 세상에서 인간을 뛰어넘는 지능의 안드로이드(Android, 인간 형태의 인공지능 로봇)를 사냥하는 현상금 사냥꾼 릭 M. 데커드(Rick M. Deckard)의 얘기입니다.

 

어디선가 접한 내용 같지 않나요? 1982년 개봉 당시 평단의 혹평 일색이었으나 오랜 시간이 흘러 재평가된 SF 영화계의 저주받은 걸작이자 사이버펑크 장르의 선구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의 원작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안드로이드 사냥을 제외하면 내용은 거의 다르지만요.

 

블레이드 러너에서 릭 데커드와 대척점에 선 존재는 로이 배티(Roy Baty)입니다. 지구에 불법 잠입한 레플리칸트(Replicant, 유전자 복제 인조인간) 집단의 수장으로 전투력과 지능 모두 인간보다 월등한 군사용 모델이죠.

 

소설과 달리 영화상에서는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레플리칸트지만 둘 모두 동력원 소진과 노후화 등의 문제로 수명이 고작 4년입니다.

 

2016년에 생산돼 2019년에 작동을 멈추는 로이 배티 역할은 1944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영화배우 룻거 하우어(Rutger Oelsen Hauer)가 맡았는데요. 감정이 없던 레플리칸트가 생애의 경험으로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모습을 넘치지 않게 보여줬습니다.

 

로보캅, 토탈리콜, 원초적 본능, 할로우맨, 블랙북 등으로 유명한 폴 버호벤 감독의 페르소나(Persona, 외적 인격)였으나 1985년작 '아그네스의 피(Flesh+Blood)'라는 영화에서 캐릭터 해석을 둔 이견 탓에 둘 사이가 소원해진 일화는 유명하죠.

 

각설하고, 생명체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레플리칸트의 처지에 분노하던 배티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2019년 지구에 잠입해 자신을 만든 타이렐 코퍼레이션의 회장 엘든 타이렐(Eldon Tyrell)을 우여곡절 끝에 만납니다.

 

지구 최고의 천재로 생명공학의 신이라 불리는 창조주에게 수명 연장을 부탁하지만 기대와는 거리가 먼 태도에 분노해 결국 그의 목숨을 없앤 배티는 데커드와도 최후의 일전을 벌이게 되는데요.

 

상대가 되지 않는 신체능력으로 적수를 압도하던 배티는 막상 데커드가 지붕에서 떨어질 위기에 놓이자 그를 구하고 자신의 짧은 생애에서 겪은 일을 들려주며 수명을 마칩니다.

 

생을 다하기 전, 배티는 비를 맞으며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그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야)"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죠.

 

이 대사는 룻거 하우어가 해당 장면 촬영 전 직접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룻거 하우어는 블레이드 러너의 시간적 배경인 2019년에 향년 75세로 네덜란드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슈에디코 강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