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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문양 감춘 독일 전범기업들

[IE Info] 전범기업과 관련된 이슈는 끊이지 않지만 1, 2차 세계대전의 주축국이었던 독일은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는 편(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을 집중적으로 때려잡고 싶지만).

 

아직까지도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나 반성의 기미가 없는 일본의 전범기업과 달리 독일 전범기업들은 사과와 함께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인데 당시 보도된 기사들을 보면 역시나 미화된 부분이 없지 않은듯.

 

1997년 연합뉴스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년만에 독일의 유수 대기업들이 나치시절의 '부역행위'를 자발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보도.

 

당시 유대인들이 금이나 은행예금에 관한 비밀들을 잇따라 폭로하자 기업들이 자신들의 과거가 남의 입을 통해 까발려지기 전에 자발적으로 밝혀 과거를 청산한다고 했다는 것.

 

(출처 : 메르세데스-벤츠)

 

아울러 같은 해 독일 금속노조가 벤츠에 "종전 때까지 2만 5000여명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며 배상을 촉구했으나 벤츠 측은 "강제노역 희생자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통감하지만 나치정권에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에 금전적 배상을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비침. 다른 독일기업들도 마찬가지로 나치의 법적 승계자인 정부가 배상책임을 져야한다며 강제 노역자들의 개별 배상요구를 거부함.

 

그러나 1988년 이들 기업에 대한 나치 피해자와 유족들의 집단 손해배상 소송이 심각한 양상으로 번지자 피해자들과의 원만한 해결을 시도하기 시작.

 

1999년 독일 정부는 독일 16개 대기업과 함께 2차대전중 나치 독일에서 강제 노역한 피해자들을 위한 배상계획을 발표하게 됨. '기억·책임·미래 재단'을 만들어 당시 100억 마르크에 달하는 강제노동 배상기금을 조성.

 

과정이 어떻게 됐든 상당수의 독일 전범기업들은 현재 과거를 인정하고 피해보상에 힘쓰는 중. 사실 현재 독일에서 현존하고 있는 대기업 중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기업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

흔히 딱정벌레차로 알려진 폭스바겐 '비틀' (출처 : 폭스바겐)

 

독일의 자동차 산업은 나치가 번영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건설해 자동차 보급을 독려하면서 성장하기 시작.

 

벤츠는 나치 정권에 전차 등 군수물자를 납품했을 뿐 아니라 종전 때까지 약 2만 5000명을 강제 노역에 동원. 전쟁 말기에는 모든 벤츠 공장에서 무기를 생산했다고.

 

BMW의 창업자 귄터 크반트는 아돌프 히틀러의 제3제국과 깊은 협력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졌음.  역사가 요아힘 숄티제크는 "크반트 가문과 나치의 범죄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며 "이 집안은 나치 정권의 일부였다"고 표현할 정도. 나치 정권에 군사용 오토바이와 전투기, 로켓 등을 공급. 전쟁 시작 후 항공기 엔진 수요가 늘자 강제 수용소 재소자들을 강제로 동원.

 

폭스바겐은  나치 정권의 자동차 대중화 정책에 따라 탄생. 창업자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는 히틀러 요구에 따라 경제적인 소형차 '비틀(BEETLE)'을 만들어 전문 자동차기업으로 성장.

나치 군복을 제작한 후고 보스. (출처 : 구글이미지 캡처)

 

남성복업체 후고 보스는 나치 시절 군복 제작으로 자본을 축적. 나치 강제수용소의 프랑스, 폴란드 전쟁 포로들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해 나치의 유니폼 생산.

 

독일의 대표적인 전기전자기업인 지멘스는 나치 정권이 들어선 후 전쟁물자를 생산해 공급. 민간용 제품 생산이 전면 금지돼 전쟁물자 생산만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이유.

 

나치에 가담한 기업은 독일기업에 한정되는 것만은 아님.  미국 IBM 역시 유대인 학살과 박해에 이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사의 데이터 처리기술을 나치에 제공. 

 

또 미국 석유기업 스탠다드 오일은 나치에 석유를 제공했으며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포드 자동차 기업은 나치로부터 전쟁포로 인력을 무상 공급받아 독일 현지 생산시설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한 것으로 알려짐.

 

스웨덴 가구업체인 이케아의 창업자 잉바르 캄프라드는 젊은 시절 스웨덴의 대표적 나치스트였던 페르 엥달이 주도한 '새로운 스웨덴 운동(Nysvenska Rörelsen'에 가입해 나치 운동 자금을 모으고 나치 당원을 모집하는 등 나치 추종자였다고. 이후 그는 이에 대해 사과했지만 진정성 논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