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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뷰

[이리저리뷰] 명동, 슈퍼히어로 탄생의 진정한 서사

그제 오후 7시35분께 마블 스튜디오의 슈퍼히어로 캐릭터 '캡틴 아메리카' 복장을 입은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인 40대 남성 안 모 씨가 주한 중국대사관에 난입을 시도한 사건이 있었죠.

 

경찰이 건조물 침입 미수 혐의를 들어 현행범으로 체포한 후 안 씨는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혐중 여론을 체감하라는 메시지 전달이 목적이었던 행동'이라는 내용의 게시글을 올렸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중국대사관이 한국 정부에 우려와 유감을 전달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가뜩이나 정국이 어수선한 마당에 이게 무슨 나라 망신스러운 소동인지 모르겠습니다.

 

서울특별시 중구 소재 행정동인 명동(明洞)에는 중국과 함께 그리스, 싱가포르, 우루과이, 칠레, 코스타리카, 크로아티아 등 여러 나라의 대사관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명동은 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거대 쇼핑 번화가이기도 하죠.

 

우리나라를 벗어난 곳에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밝다는 의미로는 동일한 지역이 있습니다. 중국 길림성 용정시 용정 서남쪽 15㎞ 부근에 위치하며 1910∼1920년대 이 지역 한인들의 문화교육운동 중심지 역할을 하던 마을.

 

1899년 2월18일 김향덕의 안내를 받은 문치정 가문의 40명, 김하규 가문 63명, 김약연 가문 31명, 남위언 가문 7명까지 모두 142명이 이상향 건설을 목적 삼아 두만강 북쪽 지역 일대인 북간도 부걸라재(鵓鴿磖子·비둘기 바위)로 이주해 이곳을 명동촌(明東村·동방을 밝히는 마을)이라고 명명했죠.

 

이후 이들은 일대 토지를 사들여 교육 관련 경비를 충당할 학전(學田)을 마련하며 교육 기금을 조성하는 동시에 김약연 등은 1901년 '규암재(圭岩齋)', 남위언은 '오룡재(五龍齋)', 김하규는 '소암재(素岩齋)'라는 공부방을 만들어 배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학문을 전파했습니다.

 

1908년에는 여러 공부방을 뭉치고 만주에 설립된 한국 첫 신학문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의 교사들을 초빙해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세웠는데 이곳은 명동학교, 명동중학 등으로 발전하며 이 지역 교육 중심지가 됐고요.

 

1900년에는 윤재옥 가문도 이곳으로 이주하며 새롭게 터를 꾸렸습니다. 바로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윤동주의 증조부죠. 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 명동촌에서 출생했고요.

 

 

김약연은 윤동주 모친 김용의 오빠입니다. 독립운동가 겸 수필가 송몽규, 사회·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명동학교에서 수학하던 윤동주는 학업에 더욱 정진하고자 1932년 시내로 거처를 옮긴 후 은진·숭실·광명학교(光明學校)를 거쳐 연희전문(延禧專門) 문과를 졸업했죠.

 

수학(受學)을 위해 일본 도시샤대학 유학을 떠난 윤동주는 1943년 7월, 이미 감시대상이던 송몽규와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으로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했습니다. 1945년 오늘은 윤동주 님이 향년 27세로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올해는 순국 80주기 되는 해죠.

 

1983년 철거됐던 그의 명동촌 생가는 해외한민족연구소가 나서 1995년에 본채, 별채 복원 후 2007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점문화재보호단위로 지정됐습니다. 지금은 룽징시 인민정부의 복원사업에 따라 윤동주전람관을 건립한 것은 물론 명동촌 일대 개발로 생가 환경까지 더 개선됐다고 하네요.

 

다만 이 과정에서 중국은 윤동주 생가 입구 경계석에 '중국조선족애국시인'이라는 문구를 새기는 등 국적을 왜곡하는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윤동주 님이 일본에서 생체실험이 거론될 만큼 가혹한 옥중 생활로 목숨을 잃은 것도 참기 힘든 판국에 사후에는 중국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먹칠을 하니 그제 있던 중국대사관 난입 시도 사건도 그렇고 이래저래 복장이 터질 지경이네요.

 

/이슈에디코 전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