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하는 김수경의 영화·씨네필 관련 이모저모 이야기' |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채영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랜덤 게임! 게임~ 스타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하 아하!
요즘에는 '아파트'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로제의 아파트냐, 윤수일의 아파트냐를 기준으로 세대를 가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죠.
지난 1982년 가수 윤수일 씨는 당시 서울 강남에 들어서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이 노래를 작사, 작곡했는데요. 발매 2년 뒤 KBS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수상하며 대한민국을 강타한 히트곡으로 부상했습니다.
지난해 10월18일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로제는 브루노 마스와 'APT.'를 공개하며 빌보드차트를 휩쓸었죠. 이 노래는 우리나라 술자리에서 흔히 접하는 '아파트 게임'에서 착안했다고 합니다. 브루노 마스는 이 노래 덕분에 빚을 거의 다 갚았다며 로제에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기도 했고요.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는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데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지금까지 이놈의 아파트 때문에 울고 웃는 사람이 부지기수죠.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국내 최초 아파트는 1932년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서울 충정로의 5층짜리 아파트인데요. 광복 이후 1959년 처음 우리 손으로 종암아파트를 세웠습니다.
이후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 붐이 일었는데요. 당시 극장에서 상영하던 '대한뉴스'에서는 '우리는 건설한다'라는 고정 코너를 통해 전국의 건축 소식을 알렸다고 합니다.
현재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에서 방영 중인 '파인: 촌뜨기들'에서도 이 당시 아파트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70년대 바닷속에 묻힌 보물선을 찾는 이야기를 담은 이 드라마에서 보물선 도자기에 탐을 내는 대기업 회장의 부인 양정숙(배우 임수정)은 돈에 대해 뛰어난 감각을 지닌 사람으로 나옵니다.
보물찾기에 열중인 회장과 달리 그는 국내 최초 민간인 고층 대단지 여의도 아파트(시범아파트) 준공과 그곳 땅값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죠. 또 회장에게 도자기를 더 사는 대신 강남땅을 한 평이라도 더 사라는 조언도 하고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는 단순 주거 공간을 넘어 자산과 부의 상징이 되면서 내 집 마련에 대한 욕구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한국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설문조사 결과 '내 소유의 집은 있어야 한다'고 답한 사람은 85%로 집계됐는데요. 이 가운데 대다수는 자산 증식이 어렵고 대출 부담이 커지더라도 내 집을 소유하겠다고 답했습니다.
때문인지 국내 영화산업에서도 아파트를 둘러싼 욕망과 각종 문제를 소재로 많이 활용하는데요. 서론이 길었죠?
이번 '수영씨'에서는 최근 넷플릭스에서 화제인 '84제곱미터'를 비롯해 현재 최근 상영했던 노이즈부터
백수아파트(2025년 작), 원정빌라(2024년 작),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년 작) 등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아파트 현실을 짚어보겠습니다.
우선 '영끌(영혼까지 끌어올림)'을 통해 아파트를 매매하거나 재건축 기대에 몸부림치는 이들이 집 값에 목을 매고 있는 모습은 앞서 언급한 영화 곳곳에 퍼졌는데요.
지난 18일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배우 강하늘 씨 주연의 84제곱미터. 생활밀착형 소재를 감각적인 스릴러로 보여주는 김태준 감독의 작품입니다. 평범한 30대 직장인 노우성(강하늘 扮)은 모아둔 적금과 미리 받은 퇴직금에 더해 무리한 대출과 어머니의 마늘밭까지 털어 내 집 마련에 성공하지만, 계속 떨어지는 집 값에 절망하게 되죠.
더군다나 대출 이자가 월급보다 높아지자 투잡까지 뛰게 되고요. 또 이 아파트에서 밤마다 울리는 층간소음 때문에 큰 일이 벌어지는데, 입주민들은 일단 집값 때문에 쉬쉬하는 상황입니다.
김선국 감독의 데뷔작 원정빌라는 재개발 이슈를 다뤘는데요. 주인공 주현(배우 이현우 扮)은 홀로 조카와 어머니를 모시면서 공인중개사직에 도전 중인 인물이죠. 동시에 열심히 일한 끝에 거주 중인 집을 사게 됩니다. 이후 빌라 주민들과 재개발을 통해 가격이 크게 뛸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게 되고요. 영화 노이즈 속 부녀회장(배우 백주희 扮) 또한 이상한 소문 탓에 아파트 재건축 심사가 물거품이 될까 노심초사하는 인물입니다. 영화 백수아파트의 주 배경인 백세아파트 역시 재개발을 앞둔 건물로 나오죠.
주택 '층간소음' 역시 우리나라에서 계속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 심각한 문제인데요. 저 역시 이전 집에서 층간 및 벽간소음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습니다. 트렌드모니터의 작년 통계를 보면 전국 공동주택 거주자 84.2%가 층간소음을 경험했답니다. 또 국민 10명 중 88%가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았고요.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이웃사이센터'에 접수된 층간소음 민원은 3만3027건에 이르다고 하네요.
84제곱미터, 노이즈, 백수아파트, 원정빌라 모두 층간소음으로부터 사건이 시작됩니다. 84제곱미터의 노우성은 매일 새벽마다 어디선가 울리는 휴대전화 진동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죠. 이 외에도 이 아파트 여러 주민이 각종 층간소음 때문에 불만을 품다 못해 큰 갈등을 일으키며 극의 분위기를 이끌어가고요.
영화 노이즈 주인공 주영(배우 이선빈 扮)은 아파트에서 층간소음을 견디지 못하다가 실종된 동생 주희(배우 한수아 扮)을 찾기 위해 아파트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는데요. 주희와 마찬가지로 층간소음에 시달리던 아랫집 주민(배우 류경수 扮)은 원인을 자매에게 돌리며 살인 협박을 시작합니다.
원정빌라의 전개 역시 층간소음에서 시작되죠. 윗집 주민 신혜(배우 문정희 扮)가 계속 층간소음을 일으키면서도 이를 방관하자 주현은 이를 참지 못하고 그의 우편함에 사이비 종교 전단지를 넣게 됩니다. 주현의 의도는 믿거나 말거나였지만, 전단지를 계기로 사이비 종교에 빠진 신혜는 빌라 주민에게 선교하게 되고요.
큰 남동생 두온(배우 이지훈 扮) 조카들을 대신 돌봐주는 백수 안거울(배우 경수진 扮)이 주인공인 백수아파트의 주된 줄거리도 층간소음인데요. 오지랖이 넓은 성격 탓에 동네 이곳저곳에서 불의를 참지 못한 채 주민들과 갈등을 일으키자 두온은 참지 못하고 집에서 나가라고 통보합니다. 이에 재개발 지역에 있는 백세아파트로 이사한 그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층간소음 해결사로 활약하고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 이기주의를 잘 짚어주는 작품인데요. 요즘 아파트 입주민이 자신의 이익을 과도하게 지키기 위해 공공의 이익을 외면하는 현상을 쉽게 볼 수 있죠.
아파트 주민 만의 권리라며 택배차량의 진입을 막거나 인근 임대주택이나 복지시설 건축을 막는 집회를 여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또 브랜드, 평수, 가격, 위치에 따라 서열을 나누는 문제도 커지고 있는데요. 이는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 내 뒷마당에는 안 돼) 현상의 한국 버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세계관은 큰 지진이 일어난 후의 대한민국입니다. 엄청난 지진 탓에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졌고 한강마저 말라버린 가운데 이상저온으로 추운 날이 이어지는 한국의 모습을 그렸는데요. 작품은 유일하게 멀쩡한 아파트인 '황궁아파트'을 주무대로 입주민과 외부인의 갈등을 첨예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파트는 주민의 것. 주민 만이 살 수 있다'라는 황궁아파트 주민 수칙에서도 잘 나타나죠.
더불어 옆 고급단지였던 드림팰리스와 상황이 역전된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그동안 드림팰리스 주민들이 자신들을 배척했듯이, 철저하게 그들을 내쫓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참고로 성경을 모티프로 삼은 장면이 곳곳에 나타나 보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작품이더라고요.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최근 여러 한국 영화에서도 보여주듯이 아파트는 더 이상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욕망과 갈등, 신분의 경계가 집약된 상징으로 변모했습니다. 단순한 영화 속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끄는 주체로 등장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거죠. 당신이 사는 곳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나요?
/이슈에디코 김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