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외국인포털에서 이달 12일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서울시는 내일부터 겨울철 동파 방지를 위해 운영을 중단했던 야외 음수대 1777대의 가동을 재개합니다. 공원관리부서, 수도사업소, 서울아리수본부가 참여하는 3단계 합동점검을 거친 것은 물론, 올해부터 수질검사 항목도 362개로 확대했답니다. 또한 연 4회 정기 수질검사 실시 후 음수대 안내판에 결과를 공개하고요. 스마트폰으로 '아리수맵'에 접속하면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음수대를 찾을 수 있고, 올해 안에 수질 정보 실시간 확인 시스템도 구축할 예정입니다. 벚꽃보다 먼저 봄을 알려주는 계절적 장치가 음수대라니 세상이 변하긴 했네요. 아주 오래 전 이 땅의 물줄기에 이름을 붙이던 사람들은 과연 맘 놓고 물을 마셨을지 문득 궁금증이 생깁니다. 지금 그 물줄기를 이어받은 서울의 수돗물 '아리수'는 안내판에 성적표를 걸고 수질 정보 실시간 확인 시스템까지 약속하는데 말이죠. '입을 대고 못 대고' 연대적 차이 운동장에서 줄을 서 음수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던 기억이 납니다. 누군가의 입이 닿았던 수도곡지를 대충 슥 닦고 입을 대는 것이 자연스러웠죠. 체육 시간이 끝나면 음수대 앞은 긴 줄이 늘어섰고 기다리다가 마시는 물은 갈증의 위력인지 천연암반수보다 상쾌했고요. 얼마 전 제가 본 서울시 야외 음수대에는 수도꼭지에 입을 직접 대지 말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공공기관이 제시하는 위생 수칙의 경계는 변동이 잦았고 어투 역시 많이 살가워졌지만 이 친절에는 점점 더 많은 조건이 붙게 됐죠. 경계의 변동을 언급한 김에 다른 대륙의 과거도 슬쩍 살펴볼까요? 1870년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폐허가 된 파리는 깨끗한 식수가 극도로 부족했고 물보다 술이 싼 시절이었습니다. 조각가 샤를 오귀스트 르부르가 다듬은 네 명의 여인상 카리아티드가 돔을 받치고 있는 분수대는 예술작품이자 실용적인 급수 시설이었죠. 이 분수대에는 쇠사슬에 매달린 주석 컵 두 개가 달려 있었지만 1952년, 파리시 공중위생위원회가 위생상의 이유를 들며 컵을 없애기로 결정했습니다. 입을 대면 안 되는 시대로의 전환기를 맞았던 파리에는 현재 1200곳 이상의 무료 음수 지점이 있다고 하네요. 이곳 역시 동파 위험 때문에 11월부터 3월 무렵까지 가동을 멈춘다니 지구 반대편 도시도 우리와 같은 시기에 물이 다시 흐른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만 합니다. 신뢰의 미덕, 믿을수록 맛있는 물맛 지난 2024년 환경부가 실시한 '수돗물 먹는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수돗물을 먹는 물로 이용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끓여 마시는 경우까지 합쳐 37.9%였습니다. 정수기를 이용하는 비율 47.5%, 생수를 구매하는 비율은 27.3%였고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 직접 음용률 51%에 비하면 최하위 수준으로, 우리나라 수돗물이 정작 우리 국민에게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지 생각을 거듭하던 중 과거 사건 하나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1991년 3월 14일, 35년 전 오늘 경상북도 구미시 두산전자 공장에서 페놀 원액 30여 톤이 낙동강으로 유출됐었죠. 오염된 물은 대구 다사취수장으로 흘러들었고, 취수장은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다량의 염소를 투입했습니다. 페놀과 염소가 만난 결과, 더 독한 클로로페놀이 됐고 수돗물의 페놀 수치가 당시 우리나라 허용치의 22배, 세계보건기구 기준 110배까지 치솟은 지역도 나왔죠. 영남 전역 1000만 명이 오염된 수돗물에 노출된 가운데 임산부들이 유산했고 시민들은 두통과 구토에 시달렸습니다. 이게 끝이 아니라 한 달 뒤인 4월 22일, 같은 공장에서 또다시 1.3톤의 페놀이 유출되며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게 됐죠. 미국 미시간주 플린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2014년 4월, 재정난에 빠진 플린트시가 비용 절감을 위해 수원을 디트로이트 수계에서 플린트강으로 전환하던 중 부식 방지 처리를 하지 않은 강물이 노후한 납 배관을 타고 흘러 수돗물 납 농도가 미국 환경보호청 기준치의 수십 배까지 치솟았죠. 2016년 1월, 연방 비상사태 선포 후 10년이 지난 2025년 7월에야 마지막 납 배관을 교체했고 이 동안 플린트 주민들은 납 중독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물이 다시 깨끗해진 뒤에도 플린트 주민 상당수는 수돗물을 마시지 않았고요. 넘길 수 있는 한 모금의 가치 국가는 국민에게 공중화장실, 벤치, 가로등, 음수대 등을 무상으로 제공합니다. 돈을 내지 않아도 앉을 수 있는 자리, 쉴 수 있는 그늘, 마실 수 있는 물 등 나라의 품격은 무엇을 무료로 남기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기죠. 다시 물이 나오는 1777대의 음수대 앞에 서는 사람이 누구든지 이곳의 물줄기는 자신을 찾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목을 축이게 할 겁니다. 다만 한 가지, 물줄기가 아닌 수도꼭지에 직접 입을 대지 말라는 부탁은 지켜줘야겠죠. 35년 전 오늘 낙동강에 페놀이 흘러든 뒤 우리 국민이 수돗물을 불신하게 된 이유는 물을 마실 수 없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봄이 온 서울의 음수대에서 다시 물이 나오는 이유는 물을 마실 때가 됐기 때문이고요. 이렇게나 단순하고 자명하게 물처럼 흘러야 할 일들이 결과에 이르는 과정은 복잡함의 연속입니다. 362개 항목의 수질검사를 거치지만 우리는 과거보다 더욱 깐깐하게 물 한 모금을 마십니다. 편의점 생수 한 병에 가격을 매기는 이 시대에 공짜 물 한 모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이슈에디코 전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