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22일 오전 11시 반쯤 경북 의성군 안평면과 안계면 2곳 야산에서 시작돼 경북 북동부권 5개 시·군으로 퍼지던 산불이 발화 149시간 만인 어제 오후 2시 반경부터 연이어 진화 중인데요. 지난 27일 오후 내린 적은 양의 비는 여기저기 멋대로 날뛰며 화마를 옮기던 불씨를 잡아준 것은 물론 진화 헬기의 앞을 가리던 연무를 가라앉혔습니다. 경남 산청군 등 나머지 지역의 화재도 주불이 잡힌 만큼 어제 오후 5시 임상섭 산림청장이 주불 진화 선언을 했지만 지난 밤사이 안동과 의성에서 산불이 부분 재발화해 진화에 총력을 기울이는 상황이라고 하네요. 4만8150㏊로 축구장 6만3245개, 여의도 166배, 서울 면적 80% 이상의 국토를 휩쓸며 우리나라에 역대 최대 규모 산림 피해를 입힌 화마 탓에 29일 정오 현재까지 사망 29명, 중상 9명, 경상 28명의 인명 피해와 3만3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국가유산 피해 사례는 모두 27건에 이르고요. 사흘 전 오후 9시22분경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주택 화재로 촉발한 무주 산불은 확산일로의 위기였으나 전일 오전 11시를 기점 삼아 완전히 진화하며 적상산 국립공원도 화마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됐습니다. 적상산 국립공원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적상산 사고라는 유적지가 있는 곳이죠. 실록을 보면 과거에도 산불에 시달린 많은 기록이 있는데 특히 관찰사의 보고를 기재한 조선시대 대형 산불 기록은 열 건 정도 됩니다. 이 중 조선 9대 임금 성종 20년인 1489년 3월14일 실록을 보면 강원도 관찰사 이육은 민가 205호와 낙산사 관음전, 간성 향교가 산불로 전소했다고 보고했으며 5년이 지난 성종 25년, 역시 강원도에 큰 불이 나 수천 정보의 산림이 불에 탔다는 기록을 볼 수 있죠. 또 18대 임금 현종 13년인 1672년 4월5일에는 강원도 강릉을 위시한 동해안 지역 대형 산불로 65명이 목숨을 잃고 민가 1900여 호, 관아 창고, 군기고가 전소했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방비하게 화재에 당하고만 있었을까요? 3대 임금 태종은 1417년 11월10일, 당시 중앙 행정기관인 육조의 하나로 지금의 기획재정부 역할을 맡은 호조에 화재방지대책 수립을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금화령(禁火令)에 따르면 종묘, 궁궐 방화자는 교수형, 왕릉이나 관공서 등 방화자는 곤장 80대 및 2년간 강제노역, 산불의 경우 곤장 100대 및 귀양 등의 처벌을 내렸다고 하네요. 아울러 조선시대 임금들은 계절에 맞춰 화전을 금지하고 즉위시기별로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 사산참군(四山參軍) 등의 벼슬을 둬 한양의 북악산, 남산 등의 성벽이나 산림을 지키게 했습니다. 여기 더해 산불예방시설로 돌 또는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들거나 도랑을 파 주요시설에 근접하는 불길을 차단하는 화소(火巢)가 있었고 각각의 산에 소재한 절에도 소임을 맡겨 산감(山監) 스님이라 칭하는 감시자가 산림을 관리하게 했고요. 이 외에 화재 발생 시 향리 주도로 주민과 화재 진압, '산림 출입금지' '산불조심' 경계표 및 경계석 설치, 젖은 흙이나 덤불로 불씨 없애기, 지역·관할 관리 문책 및 파면 등의 방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산불 지역 이재민을 위로하고자 위유어사(慰諭御使)라는 임시직을 파견하기도 했고요. 주제 사진은 2005년 여름 무렵,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사이를 잇는 문경새재에서 촬영한 '조령 산불조심 경계석'입니다.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국내 유일 순수한글 비석이라 역사적 보존가치가 높다고 하네요. /이슈에디코 전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