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한글날, 노랫말도 빼어났다

오늘은 577돌 한글날입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한글날은 1446년 세종대왕이 앞장서 만든 국보 70호 훈민정음 창제를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는 날입니다.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우리나라 5대 국경일 중 하나인 한글날은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른 법정 공휴일이며, 5대 국경일이기에 태극기를 게양합니다.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 이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 한글은 우리자랑 문화의 터전 /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들어봤거나 본 적 있으신가요? 한글날 노래 1절입니다. 24마디 4분의 4박자 세 도막(ABC) 형식으로 사장조 음계를 쓰고요. 최현배 선생이 작사를 맡고, 첼로 연주가로 동요와 가곡을 만드는데 힘쓴 박태현 작곡가가 곡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한글날인 만큼 작사가에 더 비중을 둔 정보를 전하려고 합니다. 5대 국경일 기념곡들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는데 모두 당시 최고 인재들이 나섰습니다. 

 

한글날을 제외한 나머지 4대 국경일 노래는 ▲삼일절 노래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 ▲제헌절 노래 정인보 작사, 박태준 작곡 ▲광복절 노래 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 ▲개천절 노래 정인보 작사, 김성태 작곡으로 완성했습니다. 

 

5대 국경일 중 4개 국경일 노래는 독립운동가이자 국사학계 거두 위당 정인보 선생, 한글날 노래는 역시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계 거두인 외솔 최현배 선생이 글을 붙였습니다.  

 

1893년 5월6일생 정인보 선생과 1894년 10월19일생의 최현배 선생은 한 살 차이로 각각 한성부 남부 명례방 종현계 종현동(지금 서울 중구 명동2가), 경상도 울산도호부 내상면 동동리(울산 중구 동동)가 출생지입니다. 

 

최현배 선생은 지난 1970년 3월23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눈을 감으셨는데 정인보 선생은 안타깝게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돼 정확한 기일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최현배 선생께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정인보 선생께는 이로부터 28년 후인 1990년 같은 훈장을 추서했습니다.

 

 

저서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을 남긴 정인보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기점 삼아 학문에 정진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 후 독립운동을 하던 차에 김규식, 신규식, 신채호, 박은식 선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꾸려 국민 계몽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또 집안 사정으로 귀국한 후에는 민족주의운동을 펼치는 와중에도 경성부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했고요. 1930년대 민세 안재홍 선생 등과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 시도를 알리려는 조선학운동을 주도했으며 1935년에는 정약용 사후 100주년을 맞아 '여유당전서'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1935~1936년 동아일보 논설위원, 1936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우리 민족의 정신을 알리려 노력하다가 광복 후 1946년 국학대학 학장,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초대 감찰위원장(지금감사원장)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승만 측근 비리를 적발하고도 오히려 경질되기도 했고요. 

 

이후 1950년 6.25 전쟁 당시 자택에서 등창으로 투병하던 중 인민군들이 연행해 그 해 7월 경 납북된 후 정확한 신변 정보를 알 수 없게 됐습니다.

 

학창시절 주시경 선생을 만나 조선어학강습원에서 국어 전반을 배운 최현배 선생은 1919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졸업 때 중학교 교사 자격증을 받고 귀향했으나 잠시 본업을 벗어나 조선인 상권 확보를 꾀하고자 공동상회를 세웠습니다.  

 

1920년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지내다가 1922~1925년 일본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에서 교육학 학사, 동 대학원 학위를 이수한 후 1926년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교수 생활을 하던 차에 1938년 항일비밀결사 조직인 흥업구락부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요.

 

1930년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제정 사업에 나서 주시경 학파의 형태주의 맞춤법을 주장해 표준으로 삼게 됐고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 사업에 참여해 한글 보급에 주력했습니다. 

 

그러다가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검거돼 함흥형무소 옥살이 중 광복을 맞아 석방됐고 직후 첫 정치 여론조사에서 7위에 올랐으며 해방 후 미군정청 편수국장, 한글학회 이사장 등의 활동으로 교과서 및 공문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관철해 성과를 거뒀습니다. 

 

1948년에는 우리나라 첫 정부 공인 로마자와 외래어 표기법 제정에 주축이 됐고 짧은 정치활동도 했으나 한국전쟁 휴전 후 본업에 복귀해 1954년부터 연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과대학장, 부총장, 학술원 부원장직을 지내다가 1959년 정년퇴임 후 1970년 노환으로 타계했습니다. 연세대학교의 문과대학 건물 명칭은 최현배 선생의 호를 붙여 '외솔관'으로 부릅니다.

 

/이슈에디코 강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