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는 토요일. 구독 중인 동영상 스트리밍업체 넷플릭스에서 영화 한 편을 다시 시청했습니다.
아리 애스터(Ari Aster) 감독의 영화 '유전'을 보면 주인공 가족의 집을 디오라마 시점에서 비추며 화면 전환을 통해 통제된 운명에 갇힌 인형극적 공간 구성으로 공포의 미장센을 보여주죠. 감독이 시청자를 위해 대놓고 설계한 인상적인 연출기법이라 흔쾌히 눈에 새기며 보게 됐습니다.
주인공 피터(Peter)의 어머니인 애니 그레이엄(Annie Graham)도 영화상 직업이 디오라마(미니어처) 조형사라 소품으로 집을 제작하죠. 영화 자체도 찝찝함이 남지만 태양빛 아래에서도 이질감이 도는 것 같은 집 자체의 괴이하고도 은근한 서늘함이 기억에 남더라고요.
오늘의 이미지는 OpenAI에서 개발한 GPT(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 자연어 처리용 딥 러닝 기반 언어 생성 모델)를 기반으로 하는 대화형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 서비스인 ChatGPT가 그린 유전 속 주인공의 집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외침은 적어도 이 영화 속 저주받은 집안에는 해당하지 않네요. 부모님 둘 다 전문직으로 중상류층 수준의 소득이 있거든요.
올해도 그날이 지나갔습니다. 1988년 10월 15일,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지강헌 인질극이 벌어진 날 말입니다. 교도소 이감 중 탈주해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에서 인질극을 벌인 단순 절도범 수준의 지강헌은 전국 생중계로 사회 불평등을 부르짖다가 결국 경찰특공대의 총탄에 맞아 과다출혈로 비극의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대한민국 사회의 사법 정의와 계층 간 불평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구호이자 사회비판적 개념이 됐죠. 이 말이 회자되거나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던 셀 수 없이 많은 사건 중 국내외 몇 가지 사례를 알아봤습니다.
◇지강헌 인질극 사건
1988년 서울 올림픽 직후,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탈주한 지강헌 일당이 서울 북가좌동의 가정집에서 인질극 자행. 지 씨는 560만 원을 훔친 혐의로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추가 선고받아 총 17년간 수감 예정. 보호감호제는 재범 위험자의 추가 구금 제도로, 죄질에 비해 가혹하다는 비판. 지 씨는 수백억 원대 비리를 저지른 당시 대통령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 씨가 징역 7년 선고에도 조기 석방되자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현실 비판.
◇전두환 추징금 미납
전두환 전 대통령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이 무기징역과 함께 추징금 2205억 원 선고. 그러나 전 씨는 총 재산 29만 원뿐이라며 납부를 거부하다가 지난 2021년 11월 23일, 별다른 사죄나 반성 없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90세로 사망. 불법 축적한 재산이 차명 등으로 은닉될 경우, 법과 국가 권력조차 이를 환수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유전무죄의 상징적 사례 중 하나.
◇태광그룹 이호진 전 회장 '황제 보석' 사건
태광그룹 이호진 전 회장은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 및 구속. 그러나 수감 중 병을 이유 삼아 보석으로 풀려난 뒤, 장기간 구속을 피해 외부 은신. 보석 조건으로 병 치료에 전념해야 함에도 외부에서 평범하게 지내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돼 '황제 보석'이라는 비판 쇄도. 이는 재벌 총수 형량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는 '재벌 3·5 법칙' 논란을 재차 야기.
◇O. J. 심슨 사건
전설적인 미식축구 스타이자 배우였던 O. J. 심슨이 1994년, 전처와 전처 남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자 막대한 부를 이용해 미국 최고 변호인단 구성. 변호인단은 검찰 측 증거의 신빙성을 끈질기게 공격하고 사건을 인종차별 논쟁으로 돌려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 유도. 많은 증거에도 무죄가 선고되자 국내 언론은 이 사건을 '미국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비판. 다만, 2년 뒤 유가족이 제기한 민사재판에서는 살인 책임이 인정돼 배상금 지급.
◇이선 카우치 '부자병' 사건
2013년 6월, 당시 16세였던 이선 카우치가 텍사스주 버럴슨에서 만취 상태로 픽업트럭을 몰다가 고장 난 차량을 돕던 행인들을 덮쳐 4명 사망. 카우치 측 변호단이 법정에서 피고가 '부자병(Affluenza)'을 앓고 있다는 심리학자 증언을 제시하자 법원은 10년 보호관찰 처분과 고액의 사립 재활 시설 입소를 명령. 부유한 환경에서 제약 없이 자라 책임감과 시비 판단능력이 결여됐다는 주장을 위해 부자병이라는 비공식 용어를 근거로 들어 큰 파장.
◇금융 위기 책임자들 처벌 논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글로벌 금융 위기 발생 시 위기를 초래한 월스트리트의 거대 금융사 경영진들이 대부분 처벌 회피. 이들의 투기와 부실 경영 탓에 사태가 발발하며 부지기수의 사람들이 고통받았으나 금융 엘리트들은 벌금형이나 기업 차원 합의금으로 사법 처리 마무리. 반면 소규모 경제 사범이나 서민들은 엄한 처벌을 받아 'Too Big to Fail(너무 커 망하게 둘 수 없다), Too Big to Jail(너무 거물이라 감옥에 둘 수 없다)'이라는 비판 야기.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공공도로 사업 사건
아르헨티나의 전직 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2007~2015년 재임 기간 중 건설업체들과 공공사업 수주 관련 뇌물·부정부패 혐의로 기소. 그러나 상원의원으로 재임 중이라 체포 면책 상태였던 데다가 모든 혐의를 부인한 채 자신을 '사법 마피아의 피해자'이자 '정치적 박해' 대상이라고 주장하며 항소 제기. 이로 인해 최종 판결이 지연되자 정치 고위층의 신분이 법률적 제약에도 빈틈을 만들어 사건을 회피하는 전형적 사례라고 비판.
◇아미나 보카리 사건
2010년, 홍콩 부유층 여성 아미나 보카리가 교통사고를 내 후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여러 명을 폭행하고 도주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법원은 보호관찰 및 1년 운전 금지만 선고. 법원이 '훌륭한 가정환경' '깨끗한 전력' '우수한 학업 배경'을 판결문 내용에 넣으며 감경 이유로 삼은 사실이 알려지자 거센 비판에 직면. 2001년과 2008년에도 유사 범죄를 저지른 전과가 있던 그가 홍콩 최고 법원 비상임 판사의 조카라는 배경과 맞물려 사회적 논란 확산.
/이슈에디코 강민희 기자/